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젤라 루이제 마리 (문단 편집) === 결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isela_Austria_Leopold_Bavaria.jpg|width=100%]]}}} || || 기젤라와 레오폴트 왕자, 1872년 || 기젤라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16살의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을 한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6살도 안된 기젤라를 바이에른 왕국의 실권자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루이트폴트 왕자]]의 아들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레오폴트 왕자]]와 약혼시켰다.[* 레오폴트의 아버지 루이트폴트가 어머니 엘리자베트의 외사촌으로 기젤라와 레오폴트는 육촌이다.] 이 결혼에는 엘리자베트의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는데, 엘리자베트의 남동생 막시밀리안은 작센의 아말리 공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말리에는 레오폴트 왕자와 약혼할 상황이었고, 엘리자베트는 동생을 위해 기젤라를 레오폴트의 결혼 상대로 밀었다. 레오폴트는 당연히 공작의 딸인 아말리에가 아닌 황제의 딸 기젤라를 아내로 삼기로 했다. 그렇게 기젤라는 어린 나이에 10살 연상의 인물도 좋지 않은 레오폴트 왕자와 1873년 4월 20일에 [[빈(오스트리아)|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비록 정략결혼이긴 해도 차가운 할머니와 워커홀릭인 아버지, 무관심한 어머니라는 남보다 못한 차가운 친정과 다르게 시댁인 바이에른에서 기젤라는 처음으로 환대를 받았다. 또한 시댁은 물론 남편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기젤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뜻하고 정상적인 가족과 행복을 얻었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으며 슬하에 4명의 아이들을 두었다. 이후에 기젤라는 자신을 반겨준 바이에른을 위해 바이에른의 공비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자선활동에 열중하였는데, 그 중에서 장애인과 빈민들을 열성적으로 도와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택을 개방해 부상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썼을 정도로 남편을 도와 많은 역할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에른은 공화국이 되고 혁명으로 다들 [[뮌헨]]을 떠났지만 기젤라는 동부전선에 있는 남편을 기다렸다가 함께 바트 이슐로 이주했다. 바트 이슐에서 부부는 노동자 및 군인 평의회에게 '왕족 기생충'이라 불리며 적대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기젤라의 헌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뮌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부는 뮌헨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며, [[금혼식]]을 치르기도 했다. 기젤라는 남편이 죽은지 2년 후인 1932년 7월 27일에 숨을 거두어 성 미하엘 교회 지하 묘지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